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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회 칼 럼 - Columns


영혼 사랑 3

게시자: Yosep Kim, 2011. 8. 20. 오후 12:26

우리가 전도할 때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영혼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영혼 사랑이란 무엇인가 생각 해봅니다.

 

탈무드에는 가끔 엉뚱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가 엉뚱하긴 하나 그 것이 전달하려는 의미에는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바른 원리를 말 해 주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막 갓난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머리가 둘입니다. 이 아이를 두 사람으로 보아야 할까요,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까요?

비 현실적이고 참으로 아리송한 이야기입니다.

머리가 둘이면 두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과 몸이 하나이니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회당에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게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둘이니 두 번을 축복 받게 해야 하나?

질문을 하고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약간 끔찍하게 느껴지는 비유이나,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다른 쪽 머리가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이고,

다른 한쪽이 시원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유대인이냐고 질문을 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인용합니다.

나찌나 소련 사람들에게서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았을 때 함께 아픔을 느끼고 소리를 질렀다면 유대인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혼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 해봅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이 나의 것으로 느껴 지는 것이 그런 사랑의 마음 아닐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들은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애통해하는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지도록 늘 기도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의 절규와 아픔을 함께 느끼며

그러한 영혼들을 깊이 사랑 할 수 있어야 전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혼 사랑의 마음은 내가 먼저 복음으로 확실하게 변화 됨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이 구원을 받아 영원히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에 감사함이 넘쳐나고 찬양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감격이 먼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축복을 모르고 방황하는 영혼들에 대한 아픔을 느끼고

안타까워하는 간절한 영혼사랑 함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히시기 위하여 읽은 구약 말씀이 있다. 그것은

이사야 61:1,2절 말씀이다.

 

"주께서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으니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택하여 보내셨다. 그가 나를 보내신 것은 마음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눈먼 사람을 다시 보게 하고 짓눌린 사람을 풀어 주며

주께서 은혜 베푸실 때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4: 18, 19)

 

주님께서는 이처럼 사망의 그늘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도 가장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러한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다른 영혼들을 사랑할 때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 자신을 자주 돌아보는 것은 나만을 사랑하겠다는 나의 욕심 때문일까?

나 자신을 채칙질하여 거듭나기 위하여 돌아보는 것일까?

후자였으면 좋겠다.

 

너희가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 5:20

Interstate 495

게시자: Yosep Kim, 2011. 8. 20. 오후 12:25

“저는 명절 때는 갈 때가 없었어요

오라는 곳도 없고 사람들은 그립고

호랑이보다 무서운 고독은 밀려오고

주체 할 수 없는 감정은 나를 힘들게 하고

그래서 495를 달립니다.

Amazing grace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돌고 또 돌았어요”.

이민의 외로운 삶을 홀로 사시는 집사님의 이야기이다.

 

고국을 멀리 떠나서 사는 이민의 삶은 결코 쉽지 않은 삶이다.

더욱이 가족이 없이 홀로 살아야 한다면 더욱 외롭고 고달프며,

곁에 사람들이 있어도 마음을 줄 곳이 없다고 생각되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힘들고 답답하고 고독한 이러한 때에는

기분 전환으로 하이웨이를 드라이브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별히 495는 정하여진 도시를 한 바퀴 도는 것이라

인생처럼 길을 몰라 헤맬 필요가 없어서 좋을 듯도 싶다.

 

미국의 많은 도시에는 그 도시를 중심으로 495라는 길이 있다.

도시를 한 바퀴 돌면서 형성된 길이라 일명 Beltway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495는 도시의 중요 길과 연결되어 있어서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출 퇴근 시간에는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고 생각 해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 하셨을 때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다.

물론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뼈라는 재료를 사용하셨지만

그마저 근원은 흙에서 온 것이다.

그러한 흙에서 시작된 우리가 인생을 495처럼 한 바퀴 돌고 나면 흙으로 돌아간다.

그 인생의 495도 돌다 보면 쉬울 때도 있지만 어려울 때도 있다.

즐거운 소풍 길로 갈 때도 있고 흥겹고 편하게 갈 때도 있지만

그 길이 힘들고 외롭고 사방이 막힌 듯 깜깜한 길이 되어 갈 때도 있다.

이 모든 길에 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동행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흙으로 만드셨을 때

하나님께서 생기 (생명의 호흡, )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떠날 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넣어 만들어진 우리 모두 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계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영이 우리 안에 있어서 서로가 아름다운 교제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영’이 있기에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있는 한 그가 동행함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고독하게 혼자 있게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이 영적 교제를 통하여 하나가 되어

인생의 495를 돈다면 우리의 인생은 행복한 것이다.

쉽지 않은 이민의 삶은 오히려 그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기쁨의 삶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프라미스 가족 여러분!

외롭거나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가봅시다.

죄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아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놀라운 우리들의 ,

Amazing grace를 다같이 소리 높여 부르면서

내 영이 주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부질없는 그 모든 것들 내려 놓고

인생의 495를 기쁜 마음으로 함께 달려봅시다.

고장난 사진기

게시자: Yosep Kim, 2011. 8. 20. 오후 12:24

수년 전 대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하던 때에 학교업무로 여름방학에 부산에 내려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동행한 학생 중에 부산에 살던 한 남학생이 있어 그의 집도 방문하게 되었고,

부산에 도착을 하여 사무적인 일을 모두 마친 후에 학생들과 함께 바닷가로 구경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학생은 자신의 아버지가 애지 중지하던 사진기를 갖고 나왔는데, 그 카메라는 그 것을 덮고 있는 오래된 멋진 가죽 외장의 모습부터 카메라의 위상을 한 것 높여 주었습니다.

 

그 사진기 앞에서 우리는 폼을 잡으며 부산의 아름다운 배경들을 뒤로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좀 더 기념될만한 사진을 남기자고 합의를 본 우리는 누가 더 위험한 사진을 찍는가 내기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절벽 끝에 서서 찍기도 하고, 큰 파도가 치는 돌 위에 서서 찍기도 하고, 심지어 절벽에 매달려 찍기도 하였습니다. 바람이 조금 더 세차게 불면 절벽으로 떨어질 수 있고, 파도를 제대로 맞으면 바다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고, 또 아차하면 낭떠러지 밑의 바다로 빠질 수도 있는 상황 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같으면 왜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젊은 객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어찌하였든 방학이 끝나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고 우리 모두는 그 사진들이 어떻게 나왔는지 매우 궁금하였습니다. 그 멋진 사진기의 주인공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사진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 대답이 “사진기가 고장 나서 사진이 한 장도 안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사진기가 고장 난 것도 모르고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폼을 잡았던 것입니다.

 

시편 17: 14절에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여기서 사용 한 ‘세상’이라는 단어가 매우 흥미로운데, 그 뜻은 ‘미끄러지다’’흐르다’라는 뜻으로 이 의미는 “세상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5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이 단어를 다윗이 사용 한 것은, 현생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하고 덧없이 끝나버릴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세상 앞에서 온갖 폼을 다 잡고 살아갑니다. 도토리 키재기도 해보고, 밤 늦도록 땅 따먹기도 하고, 골목 대장 자리를 놓고 싸우기도 하고, 메뚜기 한 마리 먹겠다고 힘들게 지은 남의 농사를 짓밟고 다니기도 하고…

                                

개인의 삶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삶 또한 그러할 수 있으니, 얼마나 많은 순간 세상적인 목표가 하나님의 뜻을 넘어 찍히지도 않을 사진을 위하여 열심히 폼을 잡는 것은 아닌지, 날마다 깊이 묵상하여 봅니다. 큰 교회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교회, 찬양을 제일 잘하지는 못하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을 온 맘 다하여 올려드리는 교회,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모이지는 못하여도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이 구름처럼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하여 함께 무릎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윗은 ‘금생’(in this lif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은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가치관 및 신앙관은 현세 중심이 아니라 내세 중심이었기에 현세의 영달을 바라고 사는 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 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3:13- 15)

 

그 때에 불에 타지 않고 하늘나라에 영원히 남을, 주님 사랑의 실천, 섬김의 삶, 전도의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2, 13)

 

전도와 문화 2

게시자: Yosep Kim, 2011. 8. 20. 오후 12:23

불과 삼 사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복음을 들고 사회의 현장에 나가면 주위의 일반인들은 복음을 들고 나간 기독교인들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을 들고 나가면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기독교 문화와 사회 문화의 차이가 점점

커져가는데 있습니다. 첨단 기계와 과학의 문명은 세상을 빠르게 발전시켜왔고 그에 따른 물질중심이며 인본주의적인 문화는 세상의 가치기준과 도덕기준을 크게 흔들어 놓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문화와 동화 될 수 없는 진리의 기독교 문화는 그러한 문명에 익숙하여진 일반인들에게 거리감을 주고 그들은 쉽게 접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국 복음을 들고 나가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이방인처럼 생각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문화도 사용하시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이 속하여 있는 세상의 문화를 아주 무시하고는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세상의 문화는 하나님을 향하여 유익하게 사용될 수도 있겠으나, 또 어떤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것, 복음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것을 택할 줄 아는 영적인 분별력, 순간 보다는 영원한 것을 바라볼 줄 아는 영원에의 소망과 지혜와 현명함 입니다.

 

사단은 복음이 세상으로 전파되는 것을 훼방하는 것을 넘어서, 더욱 악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문화라는 개체를 통하여 우리 기독교에 침투하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문화가 일반 세상의 문화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같다면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은 갈 곳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의 문화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필요한 수많은 영혼들을 향하여 우리는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유와 권리를 절제하고 복음을 위하여 종의 자세를 취하여 세속의 문화에 익숙한 자들을 섬겼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영적인 분별력과 지혜를 구하며, 이제는 십자가를 꼭 붙잡고 사도 바울처럼 우리 주위의, 태초 이전에 선택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 섬기어 천국 잔치에 참여시킬 때라고 생각합    니다.

 

세상 문화에 익숙한 자들을 평강과 기쁨의 하나님 문화 안으로 인도하여 훗날 하나님으로부터 큰 상급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고전 9:19, 22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았으나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또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내가 믿음이 약한 사람처럼 되어 그들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간판 2

게시자: Yosep Kim, 2011. 8. 20. 오후 12:22

, 목사님 여기 한인 교회가 있었나요? 왜 간판이 없나요? 저는 몰랐네요.

간판이 있으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고 찾아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교회가 이곳에 개척을 한지 이제 6개월이 넘었습니다.

교회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는 교회 간판이 필요한데

우리 교회는 아직 자체 간판이 없습니다.

교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자체 간판을 하루빨리 붙여 우리교회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더 많은 성도들이 참여하는 교회가 되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법을 준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 카운티의 법이 한 교회에 간판이 하나만 허락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교회를 빌려서 예배 드리는 우리교회는 간판이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곳인데

그런 교회가 불법을 행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미국 교인들이 그들의 자리를 내어주어서 베너를 주말에 붙이게 되었고,.

주말에만 올라갔다 내려가는 조그마한 베너가 저희 교회를 광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그러한 마음을 보셨는지

주말에만 붙이는 예배시간도 표기 되지 않고 교회 이름만 있는 작은 베너를 보시고도

교회를 찾아오시는 성도님들을 허락 하시었습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성실하게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조언을 따라 이제는 예배시간도 표기된 베너를 걸 수 있게 되니 더욱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미국교회에서는 자신들의 간판을 새로 하면서

그곳에 우리 교회 이름을 넣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주님 감사합니다! 더디 가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프라미스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5: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기이하고 특이한 사랑 2

게시자: Yosep Kim, 2011. 8. 20. 오후 12:21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시편 17 7절에는 ‘주의 기이한 인자’라는 별한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서 ‘기이하다’라는 말은 ‘특이하게 진기한, 보통과는 달리 보배롭다’라는 의미이며,

주의 인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의 그의 백성을 향한 사랑은 어려운 특이하고 진기하다 라는 뜻이 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기로 결정하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미 구원 받은 수 많은 전도자들을 보내어

‘돌아오라, 나의 자녀가 되어 나와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살자’라고 끊임없이 권고하시는데도 정신 차리고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할 당사자들은 거들떠도 보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또 전도자들을 보내어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 받을 만한 자로서의 어떠한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습, 태도, 상태, 그 어떤 조건과는 관계없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보면 짝사랑에 가까운 하나님의 사랑은 실로 기이하기 그지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사랑하신 자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고, 우상까지 섬기고, 참으로 하나님 속을 많이 썩였던 그들인데 하나님께서 버리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이 오늘도 지속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 같이 적용되고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기이하고 특이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이러한 기이한 사랑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이한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훗 날 천국에 가서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당신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천국에서 살게 되어서 고맙다는 말들을 듣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가정

게시자: Yosep Kim, 2011. 5. 2. 오후 3:56

가정은 가장 작은 사회 단위이다.

가정에 소홀한 사람은 사회에 도움이 될 수도 없고,

거대한 사회의 진정한 일부가 될 수도 없다. (탈무드에서)

유대인들은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사회에 공헌 하는 그 모든 것은

먼저 가정에서 책임을 다한 뒤의 일로 간주하기에

가족의 일원으로 자신의 가정에 먼저 충실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특히 오랜 세월 국가를 갖지 못하고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던 이들에게

가족은 더욱 큰 의지처였다.

그래서 이들은 혹독한 현실에 직면 할 때마다 가족 전원이 일체 되어

서로 돕고 격려하며 위로하면서 가족의 끈을 유지하였다.

 

요즘 버지니아에서는 아버지 학교가 진행되고 있다.

아버지는 4가지의 기능으로 가정에 영향을 주는데

그것은 결속하기, 사랑하기, 인도하기, 파송하기이다.

그 중에 결속하기는 아버지가 가족을 하나로 만드는 기능을 말하는데

아버지가 결속하는 기능을 잘 할 때 자녀들은 소속감을 느끼며 가치감자신감을 갖게 되고 이것은 자녀들이 건전한 자아상을 만들어 가는 기본 요소가 되는 것이라 가르친다.

 

가족의 일원들이 자신의 가정에서 소속감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것은 그 소속감에서부터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소속감을 통하여 ‘무엇을 목적으로 사는가를 알아 간다는 것이다.

동생을 죽인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유지하였으면서도, 성을 쌓고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므로 결국은 그 가족은 멸절 당하였다.

또 다른 씨 ‘셋’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하는 생활을 하였기에 오늘날까지 구속사를 이어가고 있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그 구속사의 열매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성삼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

우리는 그 안에서 소속감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소속감을 갖고 사는 우리의 삶의 목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

이렇게 삶을 영위할 때 그 분의 영적 능력과 생명력 있는 사랑은

우리 프라미스 가족 모두에게 전달되어

내 가정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에까지

그리스도의 진정한 섬김의 사랑을 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프라미스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늘도 찬양하며 기쁨으로 섬기는 지체들,

그러한 우리들이 주안에서 한 가족인 것이다.

모종

게시자: Yosep Kim, 2011. 5. 2. 오후 3:54

믿음을 모종합니다.

 

집 뒤에 조그마한 텃밭이 있어 해마다 봄이 되면 잡풀을 뽑고 땅을 갈아줍니다.

땅을 뒤집다 보면 그 안에서 새로운 싹들이 자라는 것을 보는데

그것들 중 어떤 것은 파, , 고추 같은 씨앗들이 새롭게 자라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잡풀들이 자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의 영양분을 빼앗아 자라는 잡풀들을 일찍 뽑아주어야 하는데

그것들이 작을 때는 전혀 구분을 할 수가 없어서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씨가 뿌려집니다.

그런데 그 씨가 꼭 유용한 씨만 심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늘 믿음의 씨를 심고 가꾸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불신의 씨가 심어져 자라고 있다면,

그것들은 자라면서 점점 우리의 믿음을 더 성숙되지 못하게 하므로

우리의 영혼은 싱싱한 열매를 못 맺고 말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수도원에 모범적인 수도생이 있었습니다.

수도원의 원장님은 그 수도생을 매우 아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수도생들이 편애한다고 불평이었습니다.

수도원장은 모든 수도생들을 모이게 하고 새 한 마리씩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이 새를 살그머니 죽이고 다시 모여라.

저녁이 되었습니다. 수도생들은 죽은 새를 한 마리씩 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범 수도생은 새를 죽이지 않고 산채 가지고 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수도원장이 새를 왜 안 죽였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았는데 아무도 없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습니다.

어디에나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수도원장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저 수도생을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다.

모든 수도생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없습니다.

불신의 씨는 하나님을 잊고 있을 때 하나님을 떠났을 때 심어집니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도 하나님 계심을 느낄 때 우리에게는 참 믿음이 쑥쑥 자라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새로운 삶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늘 살아 계실 때

우리의 마음에는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들이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곳, 어느 상황에서도 성령과 함께 늘 진실된 삶을 살아 갈 때,

그 삶이 세상 기준에 못 미치는 삶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를 더 사랑하시게 됨을 확신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는 프라미스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랑을 받는 우리가 믿음의 씨앗을 잘 가꾸어서

싱싱하고 건강한 믿음이라는 모종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아름다운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사은품과 복

게시자: Yosep Kim, 2011. 5. 2. 오후 3:43

나는 오랫동안 한 가지 after shave skin울 사용하여왔다.

30년 정도 한 가지 skin만을 고집하며 살아왔는데

매번 구입할 때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 공통점은 skin을 살 때마다 사은품을 주었다는 것이다.

뉴욕에서도 그랬고 이 곳 워싱턴에서도 그랬다.

사은품을 받을 때 기분이 좋다

그러나 지금 그 사은품들이 하나도 기억나지를 않는다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동 출신입니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왕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나라도 강하여지고 많은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복은 다 가졌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시편 16:2절에서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복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누렸던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었기에

그 분만이 자신의 진정한 복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가정, 지식, 건강, 삶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 등

일일히 나열 할 수 없는 정도로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상대적인 빈곤감과 우월감으로 인하여 꼭 필요치 않은 것을 더 가진 경우를 제하고

삶에 필요한 것들을 얻었을 때 우리는 복 받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삶의 필요를 우선 하였을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삶의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삶에서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은품에 불과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나의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그 분을 열심히 섬길 때,

사은품 주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 삼아 주신 것, 그리고 구원을 주신 것, 그리고 지금 그 분을 마음 것 찬양하고 진정으로 경배하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이 어려워졌을 때 달려 갈 그 분의 따뜻한 품이 있다는 것

이 것보다 더 큰 복은 없다는 다윗의 고백을 오늘 아침에 생각을 해봅니다.

 

16:1, 2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정직이 주는 선물

게시자: Yosep Kim, 2011. 5. 2. 오후 3:43

지난 주일 저녁에는 우리교회에서 정권사님 제자들의 바이올린 연주회가 있었다.

여자들은 멋진 드레스를 입고 남자들은 턱시도를 입고 학생들이 그 동안 연습을 하여

닦아온 기량을 부모님과 친구들 앞에서 마음 것 발휘하는 날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하여 연주를 하였지만 가끔은 실수를 하여,

스스로 인상도 찌프리고 웃으면서 하는 순수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학생들의 실수가 보기 좋았다고 하는 말이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 실수로 인하여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기 때문이기에 그렇게 생각되었다.

 

어제 새벽은 시편 17편으로 은혜를 나누었다.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기도가 정직함을 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 기도를 하니

자신의 기도를 주의하여 들어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간구하는 자가 너무나도 당당한 마음으로

마치 구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기도를 하였다.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기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삶이 늘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으로서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었는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하루는 늘 기도로 시작되었고 또한 늘 기도로 마무리 되었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고하는 기도의 삶을 살았던 그는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었다. 그러한 삶이었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 늘 솔직할 수밖에 없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대로 하나님 앞에 표현 되었던 삶, 그러한 그였기에 하나님 앞에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 그러한 삶을 살았기에 자신의 기도 제목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며 주저함 없이 간청할 수 있었다.

 

자기의 연주가 실수를 하였을 때 웃을 수가 있고 인상을 찌프린다는 것은 순수함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연주에 대하여 솔직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솔직함이 있기에 그들의 실수는 아름다운 것이고 그러한 실수로 인하여 그들은 더 좋은 연주를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음악과 같이 우리의 삶의 내면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져야 한다. 그래서 다윗처럼 잘못된 것은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 용서를 받고

또 필요한 것은 기도를 통하여 당당하게 간구하는 정직한 다윗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대하여 본다.

 

그리고 아이들의 그 솔직한 모습은, 지도하는 정 권사님의 정직하고 선한 성품을 닮아서가 아니었는가 또한 생각하여 본다.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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